음악듣기

[스크랩] 영원한 노래의 황후 / 등려군 일대기

페인트 방수쟁이 2013. 11. 18. 22:36

 

 

14억 중국 대중을 사로잡은 "영원한 노래의 황후"
[중국권 음악계의 영원한 연인 鄧麗君등려군]


연예인은 우리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14억 중화권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친 가수는 누구일까? 그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이 떵리쥔(鄧麗君)이다.
그녀의 일본명은 テレサ・テン(테레사 텐), 영문명은 Teresa Teng으로 테레사 수녀를 가장 존경하여 취했다고 한다.
그녀의 키는 167Cm, 몸무게는 47Kg으로 전통적인 중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자 가수였다.
생전에 그녀가 부른 노래는 1,000여곡이고, 모두 100장의 판을 냈으며 공식적으로 장당 100만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렸으니
그동안 발행되었던 것은 얼마인지 상상을 해보기 바란다.
그녀의 별명은 '천재가수', '중국인 중 가장 위대한 가수', '영원한 노래의 황후', '엔카의 여왕' 등 수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비록 그녀가 중국대륙을 한 번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인들 사이에는 "낮에는 라오떵(老鄧)인 떵사오핑이 통치하고,
밤에는 샤오떵(小鄧)이라는 떵리쥔이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으니 그녀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의 '밤과 낮'을 지배한 두사람]

떵리쥔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14년 전인 1995년 5월 8일 4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래는 지금도 중국 대륙과 타이완, 홍콩, 싱가폴, 동남아시아,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어지고 있다.
더욱이 그녀의 노래 중 가장 인기가 있는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은 1999년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10곡'중 5위에 랭크되었고,
2008년 9월 27일에 발사된 중국의 유인우주선 '선조우 7호'에 실려 우주공간까지 갔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는 정말로 '달님' 가까이에서 중국을 대표하여 노래하고 있으리라..

떵리쥔(鄧麗君)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의 윈린시엔(雲林縣)빠오충시앙(褒忠鄕) 티엔양춘(田洋村)에서
아버지 덩슈웨이(鄧樞爲), 어머니 자오수궤이(趙素桂) 사이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大埤鄕 dapixiang]
떵리쥔의 이름 본래 '리윤(麗筠)'이었는데,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동료들이 추천한 청나라 여류작가 천레이성(陳端生)의 희곡 [재생연(再生緣)]에서
재능이 출중했던 송나라의 '멍리윤(孟麗筠)'으로부터 딸의 이름을 취하였다는데,
발음을 사람들이 쥔(君)으로 하기도 하여서 리쥔(麗君)으로 나중에 고쳤다.
그래서 사후에는 묘지를 균원(筠園)으로 명명하였고 묘비명에는 본명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아마도 떵리쥔이 재인으로 살아갈 운명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녀는 태어나면서 노래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자질을 더욱 발휘하게 된 것은 1960년 초등학교 2학년 때 은사 리청칭(李成淸)으로부터 노래지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공연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로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2학년 때 휴학하고
[우주(宇宙)음반회사]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래를 취입하고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鄧麗君宇宙唱片時期]
이후 홍콩, 일본 등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고 가는 곳마다 인기가 대단했다.
그녀는 언어 분야의 재능이 특별히 뛰어 났다.
그녀는 외국어로 영어, 일어, 프랑스어, 말레시아어와
중국어로는 북경어, 민난어(南어), 광동어, 상하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특히 상하이어를 잘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일본회사가 통역을 붙여주었으나 반년 뒤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어를 잘했다.

1970년대 말부터 중국대륙에도 그녀의 노래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은 녹음기의 보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따라서 반도체 녹음기를 통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대륙에서 떵리쥔의 노래는 금지곡이었다.
이유는 1930, 40년대 상하이의 '퇴폐적인 음악(靡靡之音)'과 구별이 없고
가사도 매우 불건전(爛不健康)하다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부친의 타이완 군대근무 경력과 떵리쥔이 타이완 군대에 대한 여러 차례의
위문공연,
또한 타이완의 노래인 [梅花매화], [中華民國頌중화민국송]등을 불렀고 타이완에서 '애국가수',
'군인들의 애인(軍中情人)'이었으며 금문도(金門島)에서 대 중국방송으로 '반공'을 강조하였던 이유가 더 문제였다.
이념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단파 라디오로 몰래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이후 개혁개방이 되면서 1980년대 초, 중국 대륙의 몇 몇 여자 가수들이 떵리쥔을 모방하여 노래를 불렀다.
예를 들면 리꾸이(李谷一), 주밍잉(朱明瑛), 청린(程琳) 등이 이른바 '대륙의 떵리쥔'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국의 유행 음악사상 그녀의 노래는 전무후무하고 이미 세계문화유산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목소리가 청아하고 완벽한 창법으로 10억 명의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중국 전통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떵리쥔은 유명한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곡조를 붙여
부른 [但原人長久단원인장구]와 후당(後唐)의 황제였던 이욱(李煜)이 지은 시
[春花秋月何時了]를 노래한 [幾多愁기다수.(虞美人)]와 [獨上西樓독상서루]와
같은 명문장의 시에 곡조를 붙여 낭낭한 목소리 부른 노래는 그녀만의 독특한 음악세계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의 1000여곡의 노래 중 대표적인 노래는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甛蜜蜜첨밀밀],
[再見我的愛人재견아적애인], [小城故事소성고사], [我只在乎你아지재호니],
[漫步人生路만보인생로], [海韻해운], [忘記他망기타]가 자주 불리워지고
지금도 중화권 어디에서든 들리는 노래들이다.

한편 그녀의 남자 친구 이야기도 흥미를 끄는데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녀가 18세가 되었을 때 만난 첫사랑 린쩐파(林振發)는 말레시아의 부호의 아들로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두 번째는 25세에 만난 천상린(陳祥林)이었지만, 그가 타이완의 유명한 여배우 린칭사(林靑霞)와 약혼을 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세 번째는 1979년 27세 때 미국에서 만난 영화배우 청롱(成龍)으로 잠시 동안 서로 사랑했지만 헤어졌고,
네 번째는 29살 때 만난 말레시아의 사탕수수 재벌인 '상그리라그룹'의 아들 꿔공승(郭孔丞)과 비밀리에 약혼했으나
꿔공승의 할머니가 떵리쥔에게 가수 은퇴 조건을 내걸자 헤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37세에 만난 14살이나 어린 프랑스 사진작가 [스테판 퓨엘]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마지막을 지켰다.
어쩐지 쓸쓸함이 배어 있다.
결국 떵리쥔은 1995년 5월 8일, 태국 치앙마이의 메이핀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사망, 향년 42세였다.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던 14세 연하의 사진작가였던 프랑스인 스테판 퓨엘이 마지막 간호를 했다.

[장례식장]에는 중화민국 청천백일기와 국민당 당기로 그녀의 관을 덮어주었다.
국기는 당시 총통부 비서장 우보슝(吳佰雄) 등 4명이 직접 덮었고, 국민당의 당기는 허수덕(許水德) 등 4명이 덮었으며,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훼이(李登輝)는 [예술계의 공헌을 한 인물(藝苑揚芬)]이라는 만장을 내렸고,
국민당은 최고영예훈장 '화하1등장장'을 수여하였다.
장례위원장으로는 당시 타이완 성장이었던 숭추위(宋楚瑜), 행정원장 리엔잔(連戰) 등 고관들이 직접 참석하여
국장에 버금가는 의식이었다. 전 세계 3만여명의 팬들이 몰려 애도하였다. 현재 묘소는 타이베이시 동북에 자리하고 있는
금보산(金寶山)의 '균원(筠)'에 영면하고 있다.
묘(墓) 앞에서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하였다.
사후 50년 정도까지 생전 모습 그대로 둘 게획이라고 한다.
흥미있는 일은 북한에서도 떵리쥔 사망 이듬해인 1996년 2월 1일 그녀의 사진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2007년 작고 12주년을 기념하여
아사히 방송 단막극 [타이완 가수(臺灣歌姬), 떵리쥔]을 제작하여 30개 국가에 방송하기도 하였다.
중화권의 최고의 가수 떵리쥔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서 그의 고운 목소리로 우리의 정서를 어루만져 주고 있다.
짜이지엔워디아이런(再見我的愛人)"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행복하길
나의 사랑 안녕히.
잘 가세요
다시 만날 기약 없네
당신께 다 드릴께요
소중히 간직해요
내 마음을 간직해줘요 

행복하길
나의 사랑 안녕히
잘 가세요
우리 이제 이별이죠
가슴에 영원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포근한 그대사랑 잊지 못해요
당신의 뜨거운 사랑
당신의 달콤한 입술
당신의 노래에 취했던
못 잊을 우리사랑
우리사랑 안녕히
언제 다시 만날까

잘 가세요 그대여
영원히 당신을 못 잊을 거예요
당신도 날 잊지 말아요
훗날에 우리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행복하길
나의 사랑 안녕히
잘 가세요
우리 이제 이별이죠
마음속에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포근한 그대사랑 잊지 못해요
당신의 뜨거운 사랑
당신의 달콤한 입술
당신의 노래에 취했던
못 잊을 우리사랑
우리사랑 안녕히
언제 다시 만날까
우리사랑 믿어요
언젠가는 만나길

 

Good-bye, My love, 
我的爱人,再见。 
Good-bye, My love,  
相见不知哪一天。
我把一切给了你,
希望你要珍惜,
不要辜负我的真情意。

Good-bye, My love, 
我的爱人,再见。
Good-bye, My love, 
从此和你分离。
我会永远永远爱你在心里,
希望你不要把我忘记。 

我永远怀念你温柔的情,
怀念你热红的心,
怀念你甜蜜的吻,
怀念你那醉人的歌声, 
怎能忘记这段情。
我的爱,再见,
不知哪日再相见。

再见了,我的爱人。  
我将永远不会忘记你。 
也希望你不要把我忘记。  
也许,我们还会有见面的一天。
不是吗..?      

Good-bye, My love, 
我的爱人,再见。  
Good-bye, My love,  
从此和你分离。 
我会永远永远爱你在心里,
希望你不要把我忘记。

我永远怀念你温柔的情,
怀念你热红的心, 
怀念你甜蜜的吻,
怀念你那醉人的歌声, 
怎能忘记这段情。
我的爱,再见,
不知哪日再相见。
我的爱,我相信,
总有一天能再见。

 

 

 

 

음악흐르는별장Cafe

 

 

 

출처 : 음악이 흐르는 별장
글쓴이 : 프린세스 원글보기
메모 :